2025년 7월 16일
오피니언에세이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공감일기]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본 이미지는 AI를 활용해 생성되었습니다. | 출처: DALL·E, ChatGPT-4o

학교 벤치에 가만히 앉아 개미를 바라보는 일이 많다. 그들은 늘 어디론가 움직인다. 잠시 쉬며 숨을 고르는 일은 없다. 전력질주라 한들 인간의 한 발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느린 속도지만, 그들은 크게 내색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 또 앞으로 발걸음을 바삐 옮긴다.

그러나 쉼 없이 달려온 그들의 목적지가 무정한 인간의 발밑이라면, 무참한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체중보다 몇 백 배, 혹은 몇 천 배에 달하는 무게에 눌려, 이전까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던 몸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동그랗게 뭉쳐진다. 작은 점 하나로 남는다. 참으로 허무한 일이다.

아침 일찍, 가누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선 그 개미는 자신의 마지막이 내장이 터지고, 머리가 으깨지는 고통스러운 죽음일 줄 알았다면 차라리 편하게 잠을 택했을 것이다.

인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여는 당신에게 하늘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개미처럼 꾸준히 걸음을 옮기는 성실한 사람일지라도, 신호를 위반한 차량에 무참히 밟혀 삶의 흔적을 잃는 일은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선징악을 부르짖는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은 하늘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10초 뒤면 짓밟히는 자신의 미래를 모른 채 묵묵히 자신의 할 일에 전념하는 개미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일까? 당장 내일 죽을지 모르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개미처럼 살아가야 한다. 삶은 본디 불안정한 것이고, 그 불확실성의 반동으로 때때로 행복이 찾아오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다는 작은 기적에 대한 감사함을 늘 마음에 품어야 한다.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원했을 오늘이라는 찬란한 선물을 눈에 담고 더듬어야 한다. 내 삶의 마지막이 80년 후가 될지 내일 아침이 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만약 내일이 마지막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쯤은 아무런 두려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꼭 가고 싶었던 해외여행을 미루게 했던 돈이나 시간 같은 이유들도 먼지처럼 작게 느껴진다.

개미처럼 부지런한 하루를 보내는 것과 하루하루 후회없는 쾌락을 누리는 것, 둘 중 무엇이 옳은 건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하루하루 감사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다. 수명을 다해 천천히 눈을 감는 죽음은 결코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게, 콘크리트 바닥에 눌리고 또 눌려, 페인트 자국처럼 남은 개미를 기리는 일이다.